모든 것이 다 한 시기의 회화_임나래(독립기획자/미학)

  전영진 작가는 십여 년간 〈Canvas Play〉와 〈Painting for Painting〉 시리즈를 통해 자기의 회화 세계를 선보여왔다. 그간 전영진 작가의 작업은 ‘회화를 위한 회화’로 설명되어 왔다. 그가 모더니즘 회화의 강령인 이른바 회화의 본질로서 평면성을 추구하며 캔버스라는 매체를 연구한다는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의 회화 재료 중 겉으로 드러나는 아크릴 페인트와 단번에 감지되지는 않지만 작업 과정에서 주요하게 쓰이는 매직 블록과 마스킹 플루이드, 그리고 캔버스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 또한 여전하다. 명료한 선, 단단한 면, 이러한 선과 면의 흐름을 타고 자리 잡은 색이 관객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을, 대개는 소위 대자연이라 불릴 풍경을 불러온다.   전영진이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Painting for Painting〉과 〈Canvas Play〉 시리즈의 신작도 큰 틀에서 전작과 같은 노선을 취한다. 점, 선, 면, 색이라는 회화의 기본 요소에 충실히 집중한다. 기법적으로는, 아크릴 페인트를 칠하고, 필요에 따라 페인트 칠한 면을 보호하거나 구분하기 위해 마스킹 플루이드를 사용한다. 매직 블록으로 페인트를 지우기도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은 풍경을 만든다. 전영진의 회화는 분명 특정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연상하게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파고들어야 할 지점은 ‘방식’인가 ‘무언가’인가, 아니면 ‘연상’인가? 모두 아니라면 무엇이 중요한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전영진의 회화, 나아가 회화라는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화면의 유희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영진의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표현이 담긴 〈Canvas Play〉 시리즈의 신작을 좀 더 살펴보자.

  첫째는 구도를 지배하는 곡선과 온전한 형태를 한 원의 전면적인 등장이다.
  물론 전영진의 이전 작업에도 곡선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곡선’이나 ‘원’이라고 부르기 적절하지 않았다. 물감이 흘러내리거나, 짧은 선이 모여 이루는 각이 완만해서 곡선에 가까워 보인다거나, 또는 모서리가 둥글려진 다각형에 가까웠다. 비정형의 곡선이 완전한 원이자 분명한 모티프로 대두된 것은 2018년도에 이르러서이다. 2018년 〈Cutted Canvas〉 연작에서 곡선이 쓰인 형상이 나타나고, 2019년 〈Circle Composition〉 연작에서 작품명처럼 온전한 원이 테마가 된다. 그러던 것이 2020년 근작에 이르면 흩뿌려진 물감 방울, 겹쳐진 호弧, 크고 작은 원, 화면을 가로지르는 넘실대는 곡선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그런 만큼 연이어진 직선과 사각형이 끌어가던 단단하게 짜인 분위기가 감소된다. 이전 작품들이 간접적이나마 작가가 무언가를 지시하는 풍경이었다면, 구성적으로 유연해진 신작은 관객이 각기 다른 정경을 짐작게 하는 심상의 구현과도 같다.

  둘째는 질감 그 자체로 형태와 물物이 되는 미디엄의 사용이다.
  전영진은 최대한 납작하고 평평하게 그리되 형상을 만드는 것을 자기 회화의 목표로 삼아왔다. 이번 전시에 걸린 〈Painting for Painting〉 시리즈에서 보이듯, 그는 평면성을 추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질감, 양감, 원근감 등을 배제해왔다. 구체적인 과정은 이렇다. 페인트를 얇게 여러 번 발라 미리 구획된 칸을 채운다. 페인트가 겹치지 않도록 마스킹 기법을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매직 블록으로 물감을 지워 말끔하게 마무리한다. 그렇게 페인트는 뒤섞이지 않고 캔버스 위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영역만을 차지하는 하나의 색/면이 된다. 그리고 이 색은 이웃하는 색과 만나 관객이 구체적인 형태와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무엇이 된다. 많은 풍경화가 그러하듯 페인트가 겹쳐지고 섞이면서 하나의 풍경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영진의 풍경화에서는 온전히 색으로 기능하는 수많은 면들이 캔버스 위에 평등하게 자리하고 관계 맺음으로써 하나의 풍경이 구축된다.
 
  그렇다면 〈Canvas Play〉 시리즈의 신작에서 보이는 질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흔히 마띠에르라고 불리는 재료가 만들어내는 질감은 일반적으로 입체감과 함께 시각적 느낌뿐만 아니라 촉각적 느낌을 촉발한다. 때로는 아주 도드라지는 마띠에르가 회화의 전체 화면보다 먼저 다가오기도 하며, 작가의 기법적 특징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영진의 회화에서 질감은 이와 다르다. 〈Canvas Play 20no04〉[i], 〈Canvas Play 20no32〉[ii], 〈Canvas Play 20no33〉[iii] 등에서의 반짝이고 갈라지는 미디엄, 〈Canvas Play 20no61〉[iv]에서 두텁지만 가볍게 올려진 미디엄 등은 그 자체로 돌이 되고, 해가 되고, 구름이 된다. 지시 대상을 전제로 한 미디엄이 아니라 그 물성 그대로 물物이 된다. 전영진은 이를 회화에서만 가능한 표현법으로 본다. 캔버스에 올려진 회화의 재료가 그 자체로 구체적인 형태가 되는 것. 그리고 그 형태가 속한 캔버스 화면과 별개의 서사를 끌어오지 않으면서, 동시에 온전히 재료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기능하는 것 말이다. 이는 그가 추구해온 페인트/색/면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마지막은 관계를 고민하게 만드는 형태들의 배치다.
  상술했다시피, 전영진은 화면에서 원근감을 제거하려 했고 이와 함께 공간감 또한 제척했다. 다만 보는 이에 따라 화면 속 형태들이 재배치되어 선후 관계를 형성하긴 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흐르는 강 뒤에 산이 있다거나, 해가 산봉우리 뒤로 넘어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전영진의 작품을 다시 보면 이는 자연물을 재현하는 흔한 방식에 따른 관념의 작용이자 축적된 경험에 따른 습관적 귀착임을 알 수 있다. 〈Painting for Painting 19no02〉[v]의 경우에도 점진적인 색의 변화, 명암 대비, 잘린 선에 의해 풍경이 조성되었기에 깊이를 추적해볼 뿐, 실제로는 하늘, 구름, 해, 산, 바다, 모래사장 등으로 인식될 수 있는 형태들이 명확한 진출과 후퇴 없이 나란히 놓여 있다.

    〈Canvas Play〉 신작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된다. 하지만 원, 사각 기둥 등이 겹쳐 배치되면서 원근감을 만든다. 원근감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중점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화면 속 형태의 정의와 관계가 달라진다는 설명이 더 정확할 것이다. 〈Canvas Play 20no32〉, 〈Canvas Play 20no33〉는 세로 기둥이 원을 가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완전한 원 따위는 없고 조각난 형태들만 있는 것인지 확언할 수 없다. 〈Canvas Play 20no52〉에서 〈Canvas Play 20no57〉[vi]에 이르는 작품에는 좀 더 다양한 형태가 등장한다. 구분하고 무리 지어 정의하고자 하는 우리의 지각적 욕구 때문에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어떤 풍경으로 다가왔을 장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태 간의 선후, 전후, 좌우 관계가 흔들린다. 풍경의 기저에서 시선의 흐름을 이끄는 광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이런 효과에 일조한다. 시작점과 끝점을 단정 지을 수 없는 이미지는 좌우로 무한히 확장될 것 같다가도 반대로 38x38cm 캔버스 안으로 수렴한 세계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인간을 잇는 회화

    전영진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작업에서 배제했던 요소를 끌고 들어오면서도, 자기 회화의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이는 자기 전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회화에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롭게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는 순수하게 회화 스스로 구현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계속해서 자신을 갱신할 것 또한 중요한 특징으로 주장했듯 말이다. 이는 전영진의 회화가 일찍이 평면성이라는 용어로 소개되고 설명되었지만, 그것에 담긴 많은 의미와 맥락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 동시대 회화의 평면성을 찾아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영진은 현대의 기법으로 회화를 하되 어느 시기로 편승하지 않는 이미지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는 고대로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풍경을 그린다. 한편으로는 특정한 이미지를 지시하는 언어가 배제된 작품명 “Canvas Play”가 말해주듯이, 작가는 자기가 캔버스에 펼쳐놓은 색/면의 향연을 관객이 있는 그대로 즐기기를 또한 바란다. 다시 말하면 곧은 선, 질서정연한 패턴, 정밀한 배치 등이 선사하는 균형, 조화, 리듬,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변주와 위트를 무언가의 모사나 재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그는 이렇게 21세기의 방식으로 그리고 자기의 방식으로 회화에 자유를 선사한다.

    전영진이 탐구하고자 하는 요소란 비단 회화의 기법이나 매체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작품의 어떤 요소가 “회화를 버리지 못하는 작가와 관객과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회화로의 사랑”으로 이끄는지 찾고 싶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서사는 없지만, 전영진만이 꾸려온 회화의 서사가 전개되는 회화 세계. 전영진이 회화를 연구하면서 자기가 찾은 답을 통해 감동을 주는 것, 그 감동이 그리는 이와 보는 이를 이어주고 “인간과 인간을 잇는” 순간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전영진 작가가 소망하는 회화의 목표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2020 Material is Form - 디아트플랜트 요갤러리 / 서울




오픈갤러리 큐레이터 노트

전영진 작가의 작품들은 Canvas Play라는 키워드로 묶일 수 있다. Canvas Play는 작가가 작업의 모토로 삼은 바로, 말 그대로 캔버스를 통한 유희를 뜻한다. 작가는 캔버스에 다양한 색을 칠하고 층층이 쌓인 색을 매직블럭으로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색면들을 칠하고 지우고 가리는 행위들을 캔버스를 가지고 하는 놀이에 비유한다. 하지만 마냥 즐거워 보이는 놀이 이면에는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자리한다. 다양한 매체들이 예술의 재료가 된 지금, 더 이상 실제 세계에 대한 사실적 재현이 회화의 목표가 아니게 된 지금, 회화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다른 예술적 매체들은 갖지 않은 회화의 고유한 성질은 무엇인가? 일찍이 미술사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평면성’(flatness)이라고 답한 바 있다. 작가는 그린버그의 답변에 착안해서 회화의 평면성을 작가 특유의 방법으로 부각시킨다. 풍경을 그리면서도 묘사 대상의 입체적인 면모보다는 색면들의 배열과 조화를 강조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글자가 일종의 패턴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여러 색면들과 패턴들이 겹쳐지거나 나란히 배열됨으로써 생겨나는 독특한 이미지는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 2018 오픈갤러리




CANVAS PLAY 회화의 미래, 전영진 _ 장남미

전영진의 작업은 한마디로 ‘회화를 위한 회화’라고 할 수 있다. 회화의 순수성을 탐색하는 작업에 몰입하는 전영진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의 분출이나 에고 트립(Ego-Trip)에 함몰된 정신적 딜레마가 아닌 미학과 예술사에 근거한 철저히 아카데미적인 명제와 예리한 비평적 시선을 견지하는 객관적인 태도와 주장이 있다. 전영진은, 지나치게 관대한 다양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 시대에서 일관되게 ‘회화작가’로서 전위적인 태도를 취한다.

전영진은, 작가라면 분명히 전문가적인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는,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해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는 예술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알고 고민하는 사람이므로 전문가라는 것이다. 사실 대중에게 예술가는 그런 식의 전문인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작가는, 슬픈 일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미술 작품은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감수성이 느껴지면 좋다고 믿고, 훌륭하다고 판단한다. 또 다르게는 표현의 테크닉에 집중해 얼만큼 잘 그렸는가를 따진다. 작가가 취한 방법이 무엇을 말하기 위한 것인지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미술이 어떻게 변화하고 문화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는다. 회화라는 매체 자체의 입지가 엄청나게 좁아진 데는 이런 이유들이 포함된다. 또한 다중적으로 감각을 자극하는 설치, 영상, 사진 등과 같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표현범위가 넓고 다양해지는 작품이 많아진 것도 그렇다. 회화는 표현의 다양성이 좁은 매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회화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캔버스 플레이>의 기저에 깔려 있다. 작품을 하기 위해 끝없이 공부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작업이고, 그 자체가 이런 고민을 해결하고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사실, 답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전영진은 자신이 갖는 회화의 본질과 미래에 관한 고민을 ‘이미지 텍스트’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작가가 찾은, “회화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나 문장이 그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종의 각주 혹은 지시문이 되는 그 단어와 문장이 다층적이고 다의적으로 읽히고 해석되고 쓰이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읽을 수 있는 문자’를 통해 관람객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회화의 순수성’이라는 메시지로 다시 연결되는 고리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방법을 취할 까. “캔버스 플레이 이전에 했던 작업은 추상이다. 그때도 지금 작업과 마찬가지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 감정적으로만 작품을 읽는 것을 보고 표현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텍스트는 이미지를 빨리 인지할 수 있게 만든 장치다. 그런데 도리어 직접적으로 보이는 텍스트가 더 어렵다고 하더라. 극복하고자 취한 방법이 도리어 어렵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신기했다.”

미학·미술비평가 강수미는 “전영진의 작품은 현대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있는 이라면 대체로 그 의도와 내용이 어렵지 않게 읽힐 그림이다. 이 젊은 작가의 그림에는 작품의 내용이 말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문자로 표명돼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컨대 그림 표면에 ‘PAINTING’이라는 글자만 써넣어서 작품의 내용이 액면 그대로 회화(Painting)가 되는 그림, 화면 전체에 ‘GRADATION’이라는 글자를 가로로 네 번 반복시키며 연두에서 초록까지의 색조변화(gradation)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그림, 캔버스 정면은 온통 백색으로 칠하고 옆면에 ‘A CANVAS PLAY’라고 써넣어 결국 ‘텅 빈 캔버스(a blank canvas)’가 그림의 내용임을 스스로 알리는 그림들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나는 전영진 작품을 좀 더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감상자로 ‘현대미술에 대한 전문적 이해를 가진 이’를 꼽았다. 이는 이 작가의 그림들에 내표 된 의미가 단순히 문자를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걸려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사실 전영진의 그림은 다음과 같이 현대미술의 여러 입장(혹은 유파)을 복합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입장들 또한 미술 사조상의 이슈를 이해하고 있는 감상자에게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고, ‘지적으로’ 즐길 만한 것이 된다(이 말이 혹자에게는 배타적으로 들릴 텐데, 이는 어찌 보면 전영진이 자신을 비롯해 자기 작품의 감상자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관심’-칸트의 ‘무관심성’개념에 反하는 것-이다)”라고 전제했다.

작가는 이에 대해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층위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알랭 드 보통을 DP로 들면, 그는 종종 작가 혹은 화가, 철학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단어를 모를 때는 모르는 채로 넘어가도 재미있고, 알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층위에서 읽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글이 갖는 힘이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 또한 그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무언가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라기보다는, 얕든 깊든 그대로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블랭크 캔버스’가 그런 예라고 생각한다. 관람객이 이게 왜 텅 빈 캔버스일까? 회화란 무엇이니? 라는 의문을 갖는 정도에서 그치더라도, 또 2차원과 3차원 회화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더라도 재미있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은 가.” ■ 2011 JJ Magazine




그린버그의 강령, 개념미술의 언어, 팝 아트의 유희가 결합된 회화 변종 -전영진의 ‘캔버스를 운용하는’ 그림들 _ 강수미

전영진의 작품은 현대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가 있는 이라면, 대체로 그 의도와 내용이 어렵지 않게 읽힐 그림이다. 이 젊은 작가의 그림에는 작품의 내용이 말 그대로 ‘읽을 수 있는readable’ 문자(물론 거의 영문이기는 하지만)로 표명돼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컨대 그림표면surface에 ‘PAINTING’이라는 글자만을 써넣어서 작품의 내용이 액면surface 그대로 ‘회화painting’가 되는 그림, 화면 전체에 ‘GRADATION'이라는 글자를 가로로 네 번 반복시키며 연두에서 초록까지의 색조변화gradation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그림, 캔버스 정면은 온통 백색으로 칠하고 옆면에 ’A BLANK CANVAS'라고 써넣어 결국 ‘텅 빈 캔버스a blank canvas’가 그림의 내용임을 스스로 알리는 그림들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나는 전영진 작품을 좀 더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감상자로 ‘현대미술에 대한 전문적 이해를 가진 이’를 꼽았다. 이는 이 작가의 그림들에 내포된 의미가 단순히 문자를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걸려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사실 전영진의 그림은 다음과 같이 현대미술의 여러 입장(혹은 유파)을 복합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입장들 또는 미술사조 상의 중요 이슈를 이해하고 있는 감상자에게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고, ‘지적으로’ 즐길만한 것이 된다. (이 말이 혹자에게는 배타적으로 들릴 텐데, 이는 어찌 보면 전영진이 자신을 비롯해 자기 작품의 감상자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관심’-칸트의 ‘무관심성’개념에 反하는 것-이다.)

전영진의 그림은, 서구 모더니즘 회화Modernist painting의 가장 핵심적 강령인 그린버그의 ‘평면성flatness’에, 미술의 정신적 층위를 중시한 개념미술의 ‘언어적 제시’, 그리고 시각예술을 대중 문화적 이미지 도구를 차용해 풀어낸 팝 아트의 ‘유희’를 명시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전영진의 회화가 외적 세계에 대한 어떤 모방이나 서술적 기능으로부터도 벗어나 오직 ‘회화 자체의 순수성을 자기 지시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모더니즘의 강령을 오늘 여기서 매우 충실하게 회화의 궁극적 이념Idea으로 추종한다. 그런데 그 추종은 종속적이기 보다는 ‘자의적 변조’에 가까워 보인다. 이를테면 전영진은 그린버그 식 평면성을 재 구현하기 위해 ‘추상이미지’로 화면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명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를 도입한다. 그 언어는 대체로 모더니즘 이론가와 화가들이 언명했거나 쟁점화한 화두, 또는 이 화가가 회화의 물리적-이론적 핵심 요소라고 생각하는 바를 담고 있다. 또 전영진은 평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비환영적non-illusionary 형상과 붓질 자체를 주제화하는 대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붓질과 문자 그대로 화면 위에 제시되는 작품의 개념을 통해 ‘그림의 공간이란 납작한 이차원 평면임’을 작품 스스로 재차 폭로하게 만든다. 그런데 전영진의 그림들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엘리트주의적 회화 실천, 즉 모더니즘 미술 비평이론이라는 초석 위에서 개념미술의 지성적·논리적 反미학을 프레젠테이션 하는 그녀의 작업이 팝 아트적 취향 또는 제스처와 이종 결합한다는 점이다. 그 양상은 각 그림들에서 보듯이, 문자를 디자인의 질료인 것처럼 가공한다든가, 화면 전체를 일종의 선전용 간판처럼 운용한다든가, 감각적인 색채 배합을 통해 이미지의 표면을 경쾌하고 단순한 사물처럼 변용하는 방법론을 통해 전개된다. 내용적으로 파고들면 꽤 전문적이고 미술 내재적인 전영진의 그림들이, 감상자에게 쉽게 접근할만하고, 알아들을만하고, 즐길 만해지는 변곡점이 바로 이 팝 아트 적 덧붙임에 있다. 이 같은 점에서 나는 전영진의 작업이 ‘그린버그의 강령과 개념미술의 언어와 팝아트의 유희가 결합 한 변종 회화’라 말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도 ‘완전히 지나가 버린 옛 시절’이 된 현재, 젊은 작가들은 ‘절충주의’와 ‘상호참조’에 능수능란하다. 또 그러한 태도와 방법을 제외하고, 자신의 작업을 실행해갈 원천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미 만들어진 것ready-made으로부터의 변용/변질/변형이라는 맥락 안에서 작업한다. 그런 면에서 전영진 또한 크게 예외적인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위에서 개진한 나의 분석에서도 보듯이, 상당히 철저한 미술 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 ‘회화의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려 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 2010 서교육십2010: 상상의 아카이브_120개의 시선 - 갤러리 상상마당 / 서울




전영진: 모더니즘과 워홀의 벽지/벽화(wall-painting) 사이에서 _ 고동연

2010년 상상마당에서 열릴 기획전 <서교육십2010: 상상의 아카이브-120개의 시선>에 포함된 전영진의 그림은 20세기 한때 작가들이, 그리고 이어서 미술 비평가들이 매달렸던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회화가 그저 천으로 싸여진 캔버스 위에 붓을 이용하여 물감으로 덮여진 평면이라는 것이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이와 같은 주장은 한동안 회화의 존재 이유에 대한 갖가지 비평적 담론을 만들어 내었다. 전영진의 작업에 등장하는 붓의 자국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붓으로 무엇을 묘사함으로써 스스로의 자국을 지워가는 것이 아니라 붓이 지나간 그 흔적 자체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글씨가 뒤집혀진 stroke은 알아 볼 수가 없다. 대신 부분적으로 틀리게 발음하거나 철자를 잘못 써서 단어 자체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환기시킨다. 작가는 19세기 세잔, 20세기 피카소와 같이 예술이 예술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는가? 즉 평면 위에 그려진 붓자국이 그저 붓자국(stroke)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님 한때 현대 회화의 거장들이 그다지도 집착하였던 문제에 대하여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전영진의 작업은 오히려 평면으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던 모더니즘 작가들이 간과하였던 바를 상기시킨다. 지나친 평면화는 결국 워홀이 주장한 바와 같이 회화를 장식적인 “벽지/벽화(wall-painting)”와 축약시킬 위험을 지니지는 않는지. 전영진의 작업은 이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 ■ 2010 전영진: 모더니즘과 워홀의 벽지/벽화(wall-painting) 사이에서 - Art2021 by 예화랑 / 서울




'회화를 위한 회화' _ 최순영

지극히 그린버그적 태도를 겸비한 전영진의 작품세계는 포스트모던 미술이 만연하는 오늘 날 회화 장르가 갖는 독자적 영역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영진 스스로도 작가노트의 제목을 '회화를 위한 회화'(Painting for Painting's sake)라고 명명했을 정도이니 그녀의 회화에 대한 열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단숨에 드러난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 타이틀을 살펴보면 'dis-illusion'(환영의 깨우침), 'division'(분할), 'elements'(구성 요소들), 'strokes'(붓 질), 'function of canvas'(캔버스의 기능)과 같은 매체 중심적 용어 외에 'rebirth of an artist'(예술가의 재탄생), 'linguistic form'(언어적 형상)과 같은 개념 미술적 용어를 발견함으로써 그녀의 작품이 단지 포스트모던 시대의 모더니스트 회화의 반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전영진의 작품에는 대다수의 젊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개인적 트라우마의 분출이나 정신적 딜레마가 없다. 그녀의 작품은 철저한 아카데미적 고뇌와 이를 통한 매체 간 상관관계의 실험 및 도전으로 이루어져 심미적이고도 개념적인 양상을 띤다. 작가는 스스로 예술의 지향점이 '캔버스'(canvas)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연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캔버스매체'를 연구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매체는 무엇인가? 전영진은 매체의 연구를 위한 매체로서 아크릴 페인트와 그것을 지워내기 위한 매직 블록(magic block), 그리고 페인트 된 면을 보호하기 위한 마스킹 플루이드(masking fluid)를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캔버스로만 이루어진 단일적, 혹은 복수적 작업으로 귀결되고 때로는 캔버스들을 조합한 입체의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녀는 캔버스 표면 위에 그리고(paint), 지우고(remove), 가리는(mask) 작업을 통해 근본적으로는 그린버그가 주창한 평면성을 추구하면서도 개념적으로는 모더니즘을 벗어난 회화의 폭넓은 가능성을 추적한다.

특히 텍스트와 매체의 이중적 사용을 통한 의미의 전복은 작가의 작품이 지닌 개념적 속성을 더욱 부각 시킨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dis-illusion'(2009)을 살펴보면, 화면 안에 표현된 'illusion'이라는 단어는 텍스트로서의 기표를 희미하게 나타냄과 동시에 그것의 기의는 곧 순수한 시각적 감흥 안에 묻혀 버린다. 따라서 텍스트는 데리다적 의미의 말소된 기표로서 존재하며 그것의 진의는 '문자적' 의미의 환영이 아닌 '시각적' 의미의 환영으로 미끄러진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타이틀이 'dis-illusion'(환영의 깨우침)으로 귀결되며 관객은 텍스트와 이미지간의 상관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strokes'(2009)에서도 반복되는데, 화면 안에 '붓질'이란 의미의 알파벳 S. T. R, O. K. E. 를 적은 뒤 텍스트 위에 실제적 붓질을 가함과 동시에 'stroke'라는 기표를 반쯤 말소하는 행위를 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관객이 결론적으로 보는 것은 예술가가 가한 붓 자국들의 집합, 즉 'strokes'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에 관한 텍스트와 이미지의 간극을 이용한 작업 외에도 전영진 작가는 여타 다른 방식의 실험 또한 병행한다. 'function of canvas'(캔버스의 기능)와 같이 변형되거나 재조합 된 캔버스를 이용한 입체작업이나, 'elements'(구성 요소들)와 같이 물감이 층층이 쌓인 회화 표면을 지움으로써 근본적 회화의 표면을 드러내는 작업 들이 그것이다. 현 시대에 회화의 위기를 심각히 고민하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그런 점에서 전영진의 대담한 회화적 고민은 내일의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 2009 傳展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 서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회화 다시 읽기 _ 이경은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사실 작가의 작품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이거나 관심 있는 대상, 사상과 철학과 관련 되는 것이니 어떤 방향으로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작가가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화폭에 담고, 스스로도 어떤 것을 그리는지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한 채 ‘해석은 관람자의 몫’으로 맡겨 두는 것은 꽤나 무책임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전영진은 ‘회화’를 이야기 한다. 넘쳐나는 매체의 홍수 속에서 회화의 순수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회화가 추구해야 하는 것에 대해 아주 명료하고 확실한 어법으로 제시한다. 관객의 몫도 작가 스스로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확하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품마다 두렷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 방법으로 그리기보다는 지우는 것을, 그림보다는 문자를 통해, 회화적이기보다는 학문적인 방법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설적인 방법은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만 대부분 그 방법이 미술사나 미학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관객이 어느 정도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일수는 있다. 전영진의 회화 기법을 보자.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덮고, 덜 말랐을 때 매직 블록으로 지운다. 마른 다음에는 매직 블록으로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마른 다음 또 한번 물감을 덮고 또 마르기 전에 지워낸다. 그녀는 그리는 회화가 아닌 지워나가는 회화를 그리고 있다. 즉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 회화가 가진 평면성 그 안으로 깊게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회화를 완성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회화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를 고민하던 작가가, 다시금 모더니즘적 회화에서 그 답으로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는 회화가 실현되는 장소인 캔버스가 가진 재현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이며 이것은 화면상에서 'vision'이라는 글자가 조각나는 모습을 보면서 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곱씹게 되는 체험이다. 보여 지는 글자인 ‘환상’이 깨지는 모습의 이미지로 제목인 ‘환상의 깨짐’을 잃어내는 것이다.

이와 또 다른 표현 방법으로, 기의와 기표가 동시에 보여 지는 화면 역시 그녀가 자주 쓰는 기법 중 하나다. 이는 단어와 이미지가 동시에 하나를 이야기하게 하면서, 회화 그 평면 자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캔버스 위에 'painting'이라는 문자가 그려지면서 문자와 이미지가 동일하게 ‘회화’를 이야기 한다거나 'stroke'라는 글자를 직접 스트로크 기법을 활용해 이미지화한다. 화면 위에 떠오른 문자를 화면 자체로 실재로 보여주어 캔버스와 회화 자체로의 관심을 이끌어 낸다.

이러한 그녀 특유의 언어유희나 발상의 전복은 입체를 통해 회화가 드러나는 방법까지 취한다. 앞만 보면 주사위지만 뒷면에는 이어 붙여진 캔버스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라거나 캔버스의 옆면에 ‘비어있는 캔버스’라고 적었지만 실제로 녹색 캔버스에 흰색을 칠해 놓은 는 평면을 넘어 입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평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녀의 캔버스에 관한 깊은 고뇌는 회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다양한 회화 기법을 만들어 낸다.

그녀의 그림은 미술 이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린 차갑고 명료한 그림이지만, 그 기저에는 작가의 회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뚝뚝 흐르고 있다. “회화가 너무 좋아서 하는 작업이에요. 저는 요즘 미술계에서 새롭다는 것이 새로운 매체를 사용하는 것으로만 여겨지는 것을 보면서 회화가 없어질까 봐 걱정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작업하고 있어요.” 새로움을 표방한 다양한 소재와 매체가 난무하고 차용과 변용, 참조가 자연스러운 포스트모던의 시대. 더 이상 어떤 것을 사용하고 어떤 것을 말해야 새로운 것이 될까. 거짓 새로움으로 치장한 요즘의 현대미술의 틈 사이에서 회화의 부활을 꿈꾸며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오는 그녀의 ‘회화를 위한 회화’가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 2010/서교육십2010 예비이론가 워크숍-만남의 광장




채움과 지움의 연결 - 현대의 모더니스트, 전영진 _ 곽수온

전영진의 새로운 시리즈인 Clear Lines in Abstraction(이하 CLA)에서 Clear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밝다’와 ‘지우다’라는 의미 말이다. 그녀의 그림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확인시켜주는 작업이다. 이러한 밝은 면을 지우는 과정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것을 작업실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레이어를 쌓아나가면서 작업하고, 한 겹을 그리면 일정부분을 지워낸다. 이때 아크릴 물감을 지워내는 것이 바로 매직 블록이다. 재료의 특성상 유화에 비해 굉장히 빠르게 말라버리기 때문에 색을 칠하자마자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지워나가야 한다. 원하는 만큼 지웠으면,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린 후에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채움’과 ‘지움’의 반복을 통해 여러 겹의 레이어가 겹쳐지게 되지만 일부분에는 반드시 지워진 부분들이 겹쳐진 부분이 보인다. 그 부분은 여전히 제로상태, 즉 캔버스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환영과 비환영의 경계를 무너뜨리지만 역설적으로 캔버스 속의 색면 조합이 그저 환영일 뿐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그녀의 그림은 평면회화가 여전히 환영, 혹은 구상적 재현에 구속되어 캔버스라는 것은 다 채워도 채우지 않아도 ‘완성’ 시킬 수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말한다. 레이어만 보면 그저 공간적 환영주의에 불과하지만 작품 가운데에 보이는 마름모는 아무리 레이어가 겹쳐져도 결국 그 형태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러한 칠함과 지움과 비움의 반복에 의해 드러나는 마름모는 바탕인지 형상인지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보통 미술에 있어서 재료의 특성은 자주 간과되는 것이지만 그녀는 재료의 특성에 주목한다. 본래 빨리 마르는 대신 수정이 불가능한 아크릴 물감은 오랜 세월 동안 서양회화의 기본재료가 되었던 유화물감의 대체품이 되었다. 이러한 아크릴 물감은 그 특성상 얇은 층이 겹겹이 쌓여갈 수 있는 평면회화의 가능성을 주었을 뿐 아니라,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화학물질이 들어간 지우개로 지워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크릴 물감의 유화에 비해 빠르게 변화하는 재료의 특성을 동시대 미술의 빠른 변화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마치 얼룩을 닦듯이 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매직 블록으로 원하는 부분을 닦아내는 과정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 굉장히 깔끔해 보이기 때문에 과정과의 연관성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전시대와는 다른 재료의 사용과 표현방법을 발견해서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청소도구를 이용한 작품이지만 완성된 작품은 마치 자를 대고 그리거나 컴퓨터로 작업 한 것처럼 깔끔해 보이는 아이러니한 것이 그녀의 작품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그림은 일종의 순수추상이지만 이론적 바탕이나 영향을 준 미술가를 보면 추상표현주의와 맞닿아 있다. 또한, 기본적으로 심리적 요소를 배제해버리고 순수한 시각적 경험과 총체적인 시각의 체험을 작품에서 가지도록 하자고 주장하고 ‘미술을 위한 미술’을 중시하고 시각을 제일 중요한 요소로 여기며 시각 자체를 미술을 위해 쓰기 위해 미술에서 시각만을 남기자는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바탕을 두었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을 둔 그녀의 그림에는 항상 마름모꼴이 드러나 있다. 나는 이 마름모에 모더니즘의 부활, 너무 자극적이고 정치적 시사적이 되어버린 그림들에 대한 반항 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다. 미술을 위한 미술을 원하는 그녀의 미술계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 2009 다를美 -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