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다음에 회화, 패러다임 없는 패러다임 - 황재민(미술평론가)


1. 회화 이후?

전영진의 개인전 《Painting Paintings》(2025)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하여 회화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회화를 공들여 빚은 이미지쯤으로 취급하는 것이 망설여진다면, 익숙한 이론 틀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로잘 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매체가 실체를 가진 물질이라는 생각을 떠나, 기억하기의 한 형식이라고 재규정한 적 있다.1 이는 물론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대표하는 매체론으로부터의 반향이 었다. “그린버그에게 매체의 본성은 거친 실증주의로 정초 되었다. (…) 그린버그의 특정성은 물리적 실체에 경험적으로 속박되어 있다.”2 그린버그의 매체론에서 미적 가치는 물리적 토대(support)에 충실한 자기비판으 로부터 생산된다.3 문제는 미술이, 나아가 회화가, 언제나 자신의 물리적 토대로부터 흘러넘치며 물질 이상의 것을 자아낸다는 사실에 있다.

크라우스가 매체라는 단어를 지우고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라는 단어를 새로 쓴 이유는 이 지 점을 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4 기술적 토대 개념과 함께, 매체 연구라는 모델은 물리적 토대의 단일성을 파 헤치려는 사이비 고고학 혹은 매체의 본질을 추궁하기 위해 재판에 회부하는 기소 행위를 떠나, 이항 대립 에 근거하는 패러다임에 가까운 것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단일한 매체가 아닌, 대립하는 두 개의 항이 만들 어내는 수많은 순열 조합에 의거해 논리적으로 연관된 통일성을 생산하는 기술적 토대의 패러다임은5 , 개념미술 이후의 ‘다매체’(이것 역시 ‘매체’를 대신하여 제시된다는 점에서 본질주의의 해체가 아니라 단순한 대체에 해당한다) 상황에 무분별하게 휩쓸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토대에 물리적 실체를 가정하지 않고, 규칙을 생산하고 바로 거기에 근거하면서 매체 개념을 재활성화했다.

크라우스의 이론은 미술에 있어 형식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길드’ 구성원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여기에 불만을 가질 만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회화 작가일 것이다. 기술적 토 대가 기초하는 “패러다임 개념은 그린버그적 환원에 저항하면서 매체를 물질로부터 멀어지게”6 했다. 크라우 스의 설명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이항 대립이라는 최소한의 규칙에 근거하며, 대립하는 두 개의 범주가 다양 하게 생성하는 변수에 의존한다(크라우스의 예시는 남성, 여성의 대립과 그로 인해 가시화되는 젠더(gender) 의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회화의 경우, 자신의 반대편에 놓일, 필연적으로 이항 대립하는 짝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회화의 반대 항에 무엇을 둘 것인가? 역사를? 또 다른 매체를? 그것도 아니라면 제도? 이론? 시장? 패러다임이 발생하지 않을 때, 회화는 다시 한번 물리적 실체에 천착하게 된다. 회화가 운반할 수 있 었던 잠재성은 다른 매체를 통하여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2. 《Painting Paintings》 - 패러다임 없는 패러다임

전영진은 “회화란 무엇인가”7라는 질문을 바탕에 두고 실험을 지속해 왔다. 이미 ‘회화가 끝났다’는 선언 은 몇 번씩이나 되풀이되었다. 그런데 회화란 무엇이며 왜, 그러고 어떻게 아직 지속되는가? 채 풀지 못한 비밀이 있어 지속되는 것일까, 혹은 사라져야 하는 구습이 단순히 잔존하는 것일까? 전영진의 회화는 추상 으로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형태를 갖추었고, 구상이라고 말하기에는 구체적인 대상을 암시하지 않는다. 무엇 처럼 보이지만 정작 무엇이라고 호칭할 수 없는, 분별 되지 않는 경계에 있는 이미지를 회화의 형태로 실어 나르며, 작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거듭하고 심화했다.

《Painting Paintings》를 앞두고 나눈 대화에서 전영진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게 그리고 싶었다는 말 을 언뜻 남겼는데,8 나는 이 말을 꾸준히 곱씹게 되었다. 낮과 밤은 이항 대립하는 쌍으로, 아마도 가장 일상 적으로 감각되는 패러다임의 양 끝이다. 누구도 낮이 밤으로 내려앉는 순간을 잡아챌 수 없고 밤이 다시 낮 으로 밝는 순간을 지정할 수 없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것, 추상인지 구상인지 알 수 없는 것, 그러한 알 수 없음을 회화에 부여함으로써, 《Painting Paintings》는 회화를 회화인 채로 두되, 물리적 매체의 귀속으 로부터 내보내고자 시도한다. 이와 같은 시도 끝에 전시에서 엿보이는 것은 관계다. 전시에 내걸린 회화는 각각 분리된 개별적 작업이 분명함에도 언뜻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맺으며 연속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Painting on painting 2427〉(2024)과 같은 작업이 그렇다. 작가 자신의 연작이 프레임에 가득 담긴 이 작업 에서, 전영진의 상이한 연작이 형성해 온 비가시적인 관계는 보다 직접적으로 가시화된다. 이는 곧 작가의 연작 전체를 다시 돌이키도록, 서로 동떨어진 작업이 아니라 어떻게든 연결된 작업으로 추측하도록 이끈다.

전영진은 회화 만들기를 사전(辭典) 쓰기에 빗댄 적 있다. 9 사전 또한 두 개의 범주가 이항 대립하는 닫 힌 장으로 볼 수 있다. 첫번째 범주는 의미의 정의다. 반대편의 범주는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사전이 의미를 정의하고 다시 미끄러지게 하듯, 《Painting Paintings》는 회화의 정의를 탐구함으로 그것을 다시 미끄러지게 한다. 전영진의 회화에서 살필 수 있는, 서로 다른 연작의 보이지 않는 맞물림은 이러한 미끄러짐이 물질화 되는 장소다. 하나의 연작에 담긴 모티브가 또 다른 연작에서 포착될 때, 그렇게 포착된 모티브가 다시 또 별개의 연작에서 가시화될 때, 연쇄적으로 의미를 자아내고 곧바로 탈구축하는 끊이지 않는 꼬리잡기가 시 작되는 셈이다. 그리고 “Painting Paintings”, 주어가 동사가 되듯, 관계가 맺고 맺히는 그 연쇄작용 속에서 의 미는 늘 자리바꿈을 한다. 어떠한 회화가 곧 여럿의 회화로 연결되어 켜를 만드는 과정은 충분히 두꺼워졌 을 때 어쩌면 패러다임과 유사한 것이 된다. 전영진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꾸준히 켜를 쌓 아 왔고, 《Painting Paintings》는 그러한 과정의 단면을 잘라 보여준다.

[1] 로잘린드 크라우스, 『언더 블루 컵』, 최종철 옮김, 현실문화A, 2023, 16.
[2] 같은 책, 23-24.
[3] 같은 책, 33.
[4] 같은 책, 34.
[5] 같은 책, 37.
[6] 같은 책, 39.
[7] 전영진, 작가 노트, 페이지 표기 없음.
[8]전영진과의 대화, 작가의 작업실, 2025년 1월 21일.
[9] 전영진, 같은 글.